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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⑮]'국보 투수' 선동열

한국 프로야구 40년 역사를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에이스는 '국보 투수' 선동열(49)이다.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선발 투수 부문에서 세대별(20~50대 이상)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으로 구성된 투표인단 전원에 표를 받았다. 만장일치는 전 포지션 통틀어 선동열이 유일하다. '불세출의 투수' 故 최동원, '국민 타자' 이승엽조차 40표에서 3표씩 부족했다. 선동열은 저마다 다른 야구인들의 시각과 평가 기준을 모두 만족했다. 선동열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한국야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기대받았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7년 소년체전에서 활약한 그는 당시 유일한 스포츠 전문지였던 일간스포츠에 유망주로 소개됐다. 투수로는 고교(광주일고) 3학년 때부터 이름을 날렸다. 제14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이어 열린 봉황대기에서는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고려대 1학년이었던 1981년에는 초대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 미국과의 1차 결승전에서 완투승과 결승 득점을 해내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대회 MVP도 그의 차지였다.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완투하며 한국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대표팀 투수진에는 최동원, 김시진 등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막내'였던 선동열이 가장 빼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대회 최다승리투수상과 MVP까지 차지했다. 세계선수권을 찾은 메이저리그(MLB) 스카우트들은 선동열의 공에 매료됐고, 공식적으로 영입 의사를 드러냈다. 이들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선동열은 1983년 7월 미국에서 성사된 한·미 대학 올스타 교류전에서 수년 후 메이저리그(MLB) 대표 '홈런왕'으로 올라서는 마크 맥과이어와의 여섯 차례 맞대결 모두 삼진을 잡아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선동열도 국제대회를 치르며 MLB 진출을 꿈꿨다.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받은 병역 특례를 포기하고 3년 동안 병역 의무를 완전히 이행해 미국 무대에 진출할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군사정권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그의 대학 휴학마저 저지했다. 사실상 미국 진출을 막은 것. 만약 선동열의 의지와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한국인 최초 빅리그 데뷔는 박찬호가 이룬 1994년보다 빨라졌을지 모른다. 선동열은 1985년 고향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현재 KIA) 유니폼을 입고 한국 프로야구에 입성했다. 데뷔 시즌(1985) 후반기만 뛰고도 규정이닝을 채웠고, 평균자책점(1.70) 부문 1위에 올랐다. 신인상은 팀 동료 이순철에게 내줬다. 하지만 1986시즌, 39경기(262과 3분의 2이닝)에 등판해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를 기록하며 리그를 평정했다. 그해 MVP와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선동열은 하체의 중심이동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간 후 공을 놓는다. 오른손 투수 기준으로 왼 다리가 떨어진 후 착지할 때까지의 시간이 매우 긴 편이다. 굽혀진 오른 무릎과 정강이가 지면에 거의 닿을 만큼 안정적이고 완벽한 밸런스를 보여줬다. 공에 체중이 온전히 실렸고, 그만큼 묵직하고 빠른 공을 던졌다. 이런 모습이 마치 폭격기가 이륙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며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 별명이 비단 투구폼만으로 널리 알려진 건 아니다. 선동열은 마운드 위에 있는 모든 순간 빛났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보다 화려한 기록과 수상 이력을 남긴 선수를 찾기 어렵다. 11시즌(1985~1995) 동안 통산 367경기에 등판해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탈삼진 1698개를 기록했다. MVP 3회(1986·1989·1990시즌),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6회(1986·1988·1989·1990·1991·1993시즌) 수상했다. 평균자책점 타이틀은 7시즌(1985~1991)을 포함해 여덟 번이나 가져갔다. 그 중 4시즌(100이닝 이상 기준)이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KBO가 발행하는 『KBO 레코드북』 투수 부문에서는 선동열의 이름이 없는 페이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통산 최고 탈삼진율(경기당 9.28개) 1위, 통산 평균자책점(1.20) 1위, 단일시즌 '200이닝-200탈삼진' 2회, 역대 최다 투수 3관왕(승리·평균자책점·탈삼진 기준) 달성(4회), 한 경기 최다 탈삼진(18개), 연속 이닝 무실점(49와 3분의 2이닝) 1위 등. 그중에서도 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는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대체 선수보다 몇 승에 더 기여했는지 나타내는 WAR은 선수의 팀 기여도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다. 선동열은 통산 WAR 107.07을 기록, 역대 1위를 지키고 있다. 2위 양준혁(87.22)과 차이도 크다. 투수 부문 2위는 69.07을 기록한 송진우. 1986시즌에는 WAR 14.89를 기록했다. 단일시즌 역대 최다 기록이다. KBO리그에서 가장 최근 WAR 10.00 이상 기록한 선수는 40홈런-40도루를 기록한 2015시즌 에릭 테임즈(당시 NC 다이노스)다. 이후 6시즌 동안 명맥이 끊겼다. 선동열은 6시즌이나 10.00 이상 기록했다. 투수 분업화 개념이 희미했던 1980년대 중·후반, 선동열은 팀 승리가 필요할 때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등판했다. 본격적으로 마무리 투수를 맡은 1993시즌 이전에도 꾸준히 시즌당 5세이브 이상 새긴 이유다. 해태가 리드를 잡은 경기에서 선동열이 불펜에 등장하면, 상대 타자들이 추격 의지를 잃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시절 야구인들은 "선동열 한 명을 보유한 것만으로 해태는 만년 우승 후보였다"라고 입을 모았다. 팀을 정상으로 이끄는 선수가 최고로 인정받는다. 선동열은 개인 성적만 좋은 투수가 아닌, 타이거즈 왕조의 기둥이었다. 나아가 프로야구가 가장 뜨겁게 사랑받던 시기, '라이벌' 최동원과 야구팬에 행복을 선사한 영웅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명장면을 남겼다. 선동열은 30대 중반에 다가선 나이에 일본 리그에 진출, 소속팀 주니치 드래건스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한국 야구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첫해(1996년)는 2군에 이어 교육리그(하이사이리그)까지 내려가는 시련을 겪었지만, 이듬해부터 한국야구 대표 투수다운 공을 던졌다.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1999시즌까지 98세이브를 기록했다. 선동열은 정상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사령탑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KS 우승을 두 차례 이끈다.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하며 야구인으로 모든 것을 이뤘다. 하지만 여전히 야구를 배우려는 갈증이 크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를 통계학·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에 시선을 뒀고, 경영학과 인문학을 두루 접목해 전과 다른 시각으로 야구를 알아가고 있다. 선동열은 자서전 『야구는 선동열』을 통해 현재 MLB에서 뛰고 있는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을 자주 언급하고 칭찬했다. 이 시대의 아이콘은 분명 류현진이다. 하지만 프로야구 40년 역사를 아우르는 최고의 아이콘은 단연 선동열이다. 이번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 대부분 선발 한 자리로 선동열을 꼽는데 "이유가 필요한가"라고 되물었다. 현역 투수 이용찬(NC 다이노스)은 "첫 번째 선택은 선동열 선배님이다. 같은 포지션인 대선배를 왜 뽑았는지 설명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라고 했다. SSG 랜더스 박종훈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대 최고의 투수이시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안희수 기자 2022.02.02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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